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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강방천(1)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 회장..."유아인 국가부도의 날 실존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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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네이버에 "강방천(에셋플러스 자산운용 회장)"이라고 이름을 치면 연관검색어에 함께 뜨는 연예인이 있었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유아인씨 입니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유아인씨의 역할이 회장님과 비슷했나요?

 

얼추 비슷하네요ㅎㅎ 다만 저는 투자자를 모집한 건 아니고. 저 개인적으로 순수 주식을 통해서만 했어요. 운이 좋게. 그래도 어쨌든 설정은 비슷한 것 같네요

 

 

 

 

 

어느 증권사로 입사하셨던 거예요?

 

지금 SK 증권이 제가 입사했던 1987년에 동방증권이었어요. 처음에는 전산실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잘 안 맞더라고요. 저는 자유로운 사람인데 전산실 일이 잘 안맞았어요. 그래서 2년 정도 근무하다가 1989년 초에 그만뒀죠.

 

그 다음에 입사했던 곳이 현재 신한금융투자인 쌍용투자증권에 근무했어요. 그 이전에 전산실 일만 했기 때문에 주식의 세계는 잘몰랐어요. 다만 전산실에 있으면서 주식과 성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당시 증권사 직원들은 재무제표를 안 봤어요. 하지만 저는 재무제표에서 나오는 나의 가치하고 시장에서 형성하는 가치를 매칭해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실제 기업가치와 시장가치를 맞춰보는 것을요.

 

대학교 4학년 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회계학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보는게 가능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봤던 가치랑 시장의 가치가 괴리감이 너무 컸어요.

 

그때 당시까지만해도 재무재표보다는 시장가치, 차트, 소문 등 가치보다는 가격 지향적인 시장이 주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생각한 가치를 믿었죠.

 

 

 

 

 

제가 회사 돈을 굴리는 부서로 이동을 했는데요. 그로부터 2개월 뒤에 운이 좋게 1992년에 외국인에 주식 시장을 개방하며 자본시장 자유화가 이루어졌어요.

 

제가 운이 좋다고 이야기를 하는게, 가치 지향적인 운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자본시장 자유화가 늦게 이루어졌다면 성공이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는 우선 PER이 낮은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교체했어요. 그때 들어온 외국인 자본들이 제가 교체한 종목을 매수하기 시작했죠.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PER은 내가 투자한 돈을 매년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몇년안에 회수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PER 0.5, 1인 종목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전에 한국에 있는 투자자들은 트로이카라 불리는 건설, 금융, 무역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지금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장이었죠.

 

 

 

 

 

그때는 인센티브라는 개념도 없었으니까 제가 1년에 100억, 200억을 벌어다줘도 돌아오는건 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돈이 궁핍하거나 그러진 않았고 평생의 나의 가치가 더 중요했어요.

 

그러고 93년도에 회사를 나왔죠. 그 후 쌍용투자증권에서 연을 맺은 친구들과 함께 조그만 부티크(투자자문사)를 만들었어요. 이때쯤이 96년도 초쯤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저는 자유로운 사람이면서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어요. 내가 내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는데 여기에 있으면 되겠느냐 하고 1997년부터 제 개인돈으로 주식을 시작했어요.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개인투자 초기 자금은 얼마였나요?

 

1억정도 됐었어요. 증권 우선주를 매수했죠. 저는 주주잖아요. 회사가 벌어들일(수익가치) 또는 벌어들인(자산가치) 돈이든 그 가치를 주주에게 돌려줄 방법은 3가지라고 생각해요. 배당, 자사주 매입, 청산이죠.

 

그래서 세 가지 과정에서 비교우위에 있는 우선주가 보통주보다 너무 싼 거에요. 그때 당시 보통주 대비 우선주 가격이 15%에 불과했으니까요. 이해가 안됐어요. 왜 이렇게 쌀까? 그래서 증권주 우선주를 매수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성공한 비관론자는 없다고 봐요. 낙관을 믿어요. 저는 한국이 존재하는 한 자본시장은 존재할 것이고 그곳의 플레이어인 증권사는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증권사 우선주가 그때 1,000원정도 되었을거에요. 액면가 5,000원 짜리가 1,000원, 1,200원이었을 정도였어요.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부동산을 보유하면 세금과 유지비용을 가져가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주식은 이익봐도 세금을 가져가지도 않고, 갖고 있으면 배당금을 받잖아요. 그리고 언제든지 팔 수 있는데.

 

그때 당시 증권주는 액면가의 10~12% 배당을 줬어요. 1,000원짜리 주식을 샀는데 배당으로만 500원~600원을 준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죠.

 

3~4년 뒤에는 내 1,000원짜리 주식에 대한 시가배당률이 60%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 IMF라서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그래서 저는 60%의 시가배당률을 보고 투자를 했어요.

 

 

 

 

 

그때 두달 만에 주가가 500원에서 1만 4,000원이 됐어요. 처음에 샀을 때 IMF가 올 것이다 하고 시장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냥 주가가 많이 빠졌고, 내가 믿을 것은 기업의 가치이고, 기업의 가치는 배당을 줄 것이다는 확신이 있었죠.

 

그것이 나를 지탱한 힘이었어요. 시장에 대한 회복이야기가 나오면서 공포의 반등이 일어났고 IMF때 저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강방천 :: 에셋플러스 자산운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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